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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 12월 31일까지는 스코틀랜드 왕국(Rioghachd na h-Alba)이었으나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왕국과 연합왕국을 이루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한 나라가 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300년이나 됐는데?! 남쪽 잉글랜드와 사이는 좀 소원한 편이다.



스코틀랜드인에게 잉글랜드인이라고 하는 것은 큰 실례일 수 있다. 물론 처음 대화를 나눌 땐엄청난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마주하기 전까진 상대방이 몰랐을 거라 생각해 넘어가겠지만, 스코틀랜드인임을 안 이후에도 그를 잉글랜드인(English)이라고 하면 큰 실례가 된다. 홍콩 출신들이 자신을 중국 출신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보면 쉬울 듯. 그렇지만 스코틀랜드에서 현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의견이 나뉘듯 스스로가 영국인(British)임을 인정하거나 British라고 스스로 밝히는 스코틀랜드인도 적지 않다.


사실상 역사의 분열은 고대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하드리아누스 성벽으로, 성벽 이하는 브리타니아로서 이후 잉글랜드로 발전했고, 그 북쪽은 켈트계열이 계속 남아 이후 스코틀랜드로 발전했다. 로마 제국 시기 스코틀랜드 지역은 칼레도니아라고 불렸다. 로마 제국이 철수한 이후에는 스코트족과 픽트족이라는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초반에는 픽트족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점차적으로 스코트족이 주도권을 쥐게 되어 스코트족 위주로 통합 왕국이 형성되었다. 


칠왕국 시기에 스코틀랜드는 픽트족의 주도 하에 통합되지 않은 부족 국가 중심의 여러 국가들이 뒤섞인 지역이었다. 이들은 남쪽의 후대에 잉글랜드 왕국으로 통합되는 칠왕국들보다 떨어지는 국가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일찌감치 남쪽의 노섬브리아 왕국이 로우랜드 지역을 점령하고 픽트족 일부를 복속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북쪽의 스코틀랜드 왕국, 남쪽의 잉글랜드 왕국이라는 우리가 아는 형태의 세력이 형성되었음에도 스코틀랜드의 상당부분은 잉글랜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트족 주도 하에 통일된 스코틀랜드는 데인 족의 침략과 내부 분열로 혼란스러운 잉글랜드의 상황을 이용해 차츰 남하하여, 13세기 경에는 로우랜드 지역을 모두 차지함으로서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크게 문화, 인류학적 구분으로 늦어도 14세기부터 영어를 받아들이고 종교개혁 때 개신교, 그것도 장 칼뱅의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며, 일찍부터 에딘버러, 글래스고 같은 대도시를 필두로 한 도시 문화 중심의 로우랜드, 즉 저지대 지방과 늦어도 19세기 중후반 까지 게일어를 유지하며, 반유목, 수렵 중심의 클랜 씨족 사회가 중심이었고, 아일랜드와 깊은 관계를 가지며 비교적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까지 가톨릭이나 자코바이트 중심의 성공회가 강했던 하이랜드 지방으로 구분 된 역사를 보내왔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문화적, 사회적 차이는 뚜렷할지언정 중세 초기 부터 하이랜더 클랜의 차기 지도자들은 대부분 세인트 앤드류 대학을 비롯한 로우랜드에서 교육 받고, 에딘버러 같은 로우랜드의 정계, 사회에도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두 지방의 관계는 유기적으로 상호 교류하며 섞여 발전하면서 현대 스코틀랜드란 민족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이를 대입하자면 에딘버러, 글래스고 등 스코틀랜드의 대도시는 게일어를 안 쓴지는 적어도 700년, 좀 멀리 잡으면 1,000년의 세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 잘라 켈트족이 아닌 것도 아니다. 로우랜드를 필두로 한 현대 스코틀랜드인들 다수는 이렇게 켈트계 민족 국가 중 하나이긴 하지만 영어라는 언어적 동질성을 통해 잉글랜드와 함께 영국이란 나라를 형성한 민족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이후 노르만족의 전래 이후 잉글랜드의 침공을 받았지만 웨일스와 달리 완전히 정복 당하지는 않았으나, 이 때문에 계속하여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중간에 던켈트 왕조의 알렉산더 3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고 그의 외손녀 마가렛마저 요절하면서 왕통이 끊어졌다. 이에 스코틀랜드의 귀족들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났고, 이를 틈타 에드워드 1세가 나타나 스코틀랜드를 제압하고 잉글랜드의 영토로 편입하는 등 모욕을 당했다.


당연하게도 이에 반발하는 스코트인들이 많았는데, 윌리엄 월레스라는 사람이 반란군을 일으켜 잉글랜드군을 몇 차례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기에 결국 패퇴하였다. 윌리엄 월레스와 그 부하들은 이후로 지속적인 게릴라전으로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결국 사로잡혀 죽었다. 


그러나, 이후에 스코틀랜드 귀족 브루스 가문의 로버트 1세가 윌리엄 월레스의 뒤를 이어 독립전쟁을 지속하였다. 로버트 1세는 한때 패배하여 프랑스로 망명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베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의 대군을 격파하였고, 마침내 에드워드 3세 때에는 잉글랜드로부터 독립국임을 인정받아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독립한다. 


그러나 추운 기후와 산이 많은 지형 탓에 농업 생산력이 잉글랜드보다 달려 인구는 항상 적었다. 이러다보니 국력에서 상대가 안되어 상대적으로 더 강한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양국의 결혼동맹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메리 스튜어트이다. 특히 현대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을 형성하는 베릭-어폰-트위드는 당시 한창 잘나가던 한자동맹의 주교역도시이기도 했고, 천부적인 자연요새이기도 해서 양쪽에서 먹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주로 일단 인구와 조직력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며, 나머지 유럽의 군사적, 정치적 기술 발전에도 더 발을 맞추었던 잉글랜드가 우세였지만 일단 스코틀랜드 측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험한 산악지방이 많은 스코틀랜드 내륙으로 끌어들이며 청야전술을 벌이다가 지친 잉글랜드 상대로 중세 스코틀랜드군의 주특기인 갑작스러운 보병 돌격으로 쌈싸먹은 적도 종종 있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가 남하하는 건 저지해도 본격적으로 복속 시키는 것에는 실패했다. 


브루스 가문의 지도 아래 잉글랜드에게서 독립을 확보한 이후 다시 400년 뒤 정복이 아닌 합의를 통해 연합왕국을 형성하기 전에 스코틀랜드 역사를 요약하자면 중세와 근세 왕권의 무덤 정도로 요약 할 수 있다. 


중세 후기부터 17세기의 동군연합과 국가 통합까지 스코틀랜드 조정의 지상 과제는 둘, 하나는 너무도 당연한 천하의 원쑤 잉글랜드에 대한 방어였고, 다른 하나는 왕실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않고, 맥도널드, 더글라스, 맥코넬, 켐벨, 카메론 등 강력한 하이랜드의 클랜들이 서로 끊임없이 이권 다툼을 하며 실질적인 무정부 상태였던 잉글랜드와의 국경지대, 서부 해안과 섬들, 그리고 하이랜드의 평정과 복속이었다. 특히 중앙 집권이란 측면에서 정복왕 윌리엄 이후 둠스데이북이 상징하는 런던에 기반한 강력한 왕권과 체계적인 지방 행정을 꾸준히 정착시킨 잉글랜드에 비해 스코틀랜드는 기본적으로 켈트계 사회가 더 수평적인 측면도 있고,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왕국 성립과 독립 과정에서 하이랜드 클랜 대귀족들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에 중앙 권력의 정착에 크디큰 난항을 겪었다. 특히 현대 내외 헤브리디스 제도를 기반으로 '섬들의 군주' 라는 직함을 가지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를 겔리선으로 오가면서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 간의 중개 무역과 용병업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았던 맥도널드 가문은 한 때 스코틀랜드 왕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위세를 자랑했고, 르네상스 시대 들어서는 왕실의 충견을 자처하며 주로 국왕의 이름으로 다른 클랜을 두들겨 줘 패고 그 땅과 전리품은 자기들이 쏙쏙 챙겨먹으며 결국 하이랜드 최대 클랜이자 스코틀랜드 전국 내에서 왕실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자랑했던 캠밸 가문 같은 거대 클랜들의 존재는 스코틀랜드 왕실에게 영원한 골치거리였다. 


오래된 관습과 법제화 된 봉신의 권리로 인해 함부로 봉건 신하의 자치권과 자체적인 권력을 뺏을 수 없었던 중세 유럽의 정치판에서 이 와중에 봉건 귀족들의 최고 우두머리로서 왕실의 권위를 한방에 키울 수 있는 건 곧 전쟁.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들 또한 이 점을 파악하고 왕권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한 정치적 전쟁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클랜들 상대로든, 잉글랜드 상대로든 종종 걸곤 했다. 이게 전쟁이 잘 풀려서 실제로 부하들도 찍소리 못하게 되고, 왕실의 권위도 커지며 이를 명분으로 봉건 귀족, 도시민, 교회의 자체적인 영향력을 하나 하나 복속 시키면 참 좋은데, 인생만사가 어디 뜻대로 되던가. 게다가 여기는 왠만한 남자들은 전부 다 칼에다 활, 나중에는 권총 하나쯤은 차고 다니고, 대충 현대 글래스고-에딘버러 벨트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항시 무장한 클랜의 장정들이 서로의 양, 소, 목축지, 노예 등을 빼앗기 위해 사시사철 전쟁에 대비하며 살던 초군사화 사회 중세/근세 스코틀랜드이다. 전쟁을 통해 군왕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면 당연히 싸움도 중세 기사도적 마인드/켈트 전사 집단의 마인드 그대로 최전선에 앞장서서 싸우는 게 당연시 되었고, 이런 관습에 충실히 따르다가 자고로 적의 모가지를 눈 앞에서 클레이모어로 따버리는게 미덕인 스코틀랜드의 무사 치고 드물게 화력덕후였던 제임스 2세는 플랑드르에서 새로 사온 최신 공성포를 시험한답시고 독립 이후에도 잉글랜드가 점령하고 있었던 록스버러 성 공성 중 야포 근처에서 알짱대다가 대포 폭발로 폭사, 그 다음 제임스 3세는 아들내미가 필두로 자신의 실정에 반발한 대귀족 연합 상대로 1488년 스털링 근처 소키번전투에서 죽고, 저 애비 패죽이고 왕위 먹은 효자 제임스 4세는 그 유명한 플로든 전투에서 무쌍 찍다가 잉글랜드 잡졸의 빌에 처맞고 끔살, 또 그 아들이자 독립 스코틀랜드를 단독으로 정상적으로 다스린 마지막 군주였던 제임스 5세는 역시 영불전쟁 중 동맹을 위해 짤짤이 넣어준다고 쳐들어간 1542년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개박살나자 빡쳐서 열병으로 급사. 


약한 왕권과 이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전쟁이 아주 최악의 방향으로만 연달아 시너지를 내어 후계도 똑바로 준비 안 된 군주들이 연달아 전사해버려 스코틀랜드의 국내 정세는 개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결국 국가의 통치는 캠밸 가문을 필두로 한, 연고지는 비록 하이랜드 클랜 출신이지만 로우랜드에서 교육 받고 나머지 유럽식 왕실 행정에 익숙했던 대귀족들과 이와 연계했던 도시민, 성직자들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종교개혁이 터지면서 스코틀랜드에도 예전부터 강력한 정치적 국제 후원자였으며, 문화적으로 나머지 유럽의 선진 문물의 창구였고, 경제적으로도 교역 파트너로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지방을 통해 개신교의 바람이 불었다. 결국 16세기 중후반, 공식적인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는 너무 어리거나 주변 세력에게 휘둘러 왕권과 이와 결합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정신을 못 차릴 사이 잉글랜드에서 유학하고, 프랑스에서 옥생활도 했던 존 녹스를 필두로 한 로우랜드의 개신교 도시민들과 이와 동맹한 캠밸 가문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로 개종했던 클랜들이 힘을 합쳐 1559년 퍼스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와장창하는 걸 시작으로 왕권과 가톨릭 교회에게 정면 도전을 하고, 짦은 내전 끝에 승리함으로서 개신교, 그것도 반왕실, 반가톨릭 내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로우랜드 도시들의 평신도 유지들의 모임, 즉 장로회를 근간으로 하는 칼뱅교 국가가 되었다. 


잉글랜드와 통일된 계기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자, 스코틀랜드의 젊은 왕 제임스 6세를 잉글랜드 왕세자로 삼은 것. 제임스 왕의 할머니가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두 왕국은 통합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한 나라는 아니고 별개의 두 나라가 같은 임금을 모시는 동군연합 단계였다. 완전히 한 나라로 통일된 것은 앤 여왕 때. 


잉글랜드로 내려간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떠나온 고향 스코틀랜드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종교 문제에 있어서 옛날 신하들과 다시 대립각을 띄우기 시작했다. 어렷을 때는 존 녹스의 직계 제자이자 당대 최고의 라틴 문필가이며, 철학자, 정치학자이기도 했던 조지 뷰캐넌의 영향을 받아 본인도 강성 장로회파에 속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보다 왕권을 행사하려고 하자 장로회와 이와 동맹한 귀족, 그리고 에딘버러 시의회가 사사건건 왕권에 제한을 두려고 하고, 무엇보다 이제 새로운 조국인 잉글랜드의 성공회는 익히 알다시피 개신교임에도 가톨릭의 전례, 교계제도 등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렇게 잉글랜드와 비슷하게 왕실의 영향력이 교회에 미치는 감독제를 설치하고, 주교제를 부활시키려고 하면서 왕실과 스코틀랜드 지방 권력의 대립은 다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1618년 글래스고에 있었던 장로 총회에서 가톨릭식 무릎 꿂은 성찬을 부활시키고, 이에 반발하는 장로 총회의 문을 때려 닫아 버리고 20년간 다시 열지 못하게 만드는 걸 시작으로 스코틀랜드는 종교 문제로 다시 들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결국 세월이 흘러 아버지 만큼의 정치적 센스도 없었고, 융화력도 없으며, 무엇보다 내전기에 자라 하이랜드의 강력한 귀족들과 개인적 연줄이 다았던 아버지와 달리 스코틀랜드에는 제대로 와 보지도 않았고, 그 사정에도 전무하면서도 안 좋은 의미로 비전과 추진력만은 강했던 찰스 1세가 왕이 되면서 정국은 더욱 더 악화된다. 아무리 대립하던 관계였다 한들 기본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본인 또한 애향심을 가지며 멀리서도 적극적으로 다스리며, 이런 저런 국정 프로젝트를 추진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현지 파워 엘리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던 아버지와 달리 찰스는 윌리엄 로드 추기경을 필두로 한 성공회식 전례와 주교제를 스코틀랜드에 강제하려고 들면서 결국 열받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유력 목사들, 에딘버러와 다른 로우랜드의 시민들, 그리고 이들과 동맹했던 개신교계 클랜들은 1638년,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 교회에 모여 국민 언약이라는 종교적, 정치적 동맹을 선포하고 봉기를 일으켜 스코틀랜드 정부를 장악하면서 찰스의 왕권에 정면 도전했다. 


이 와중 찰스가 있었던 잉글랜드의 상황은 익히 알려진 의회와 국왕이 대립하던 끝에 찰스가 빡쳐서 의회 문 닫고 혼자서 직접 나라를 다스리던, 소위 11년 폭정이라 불리던 시절.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반란군이 정부를 장악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 시키기 위해 다시한번 잉글랜드로 남진하며 영국 내전의 발단이 된 주교 전쟁이라는 전쟁이 터진다. 언약파 반란군이 국경 지대인 뉴번에서 잉글랜드 국왕군을 박살내고 거의 무혈로 잉글랜드에 입성하자, 찰스는 어쩔 수 없이 의회를 다시 열게 된다. 그러나 내심 스코틀랜드의 언약파가 국왕군을 박살내며 왕권을 더 약화 시킬걸 기대했던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가 요구한 예산 조달과 군대 소집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왕이 요구한 반란 진압 예산 책정은 무시하고 각각 찰스의 종교적, 정치적 면에서 오른팔 왼팔 역할을 했던 로드 추기경과 스트래포드 공작을 기소, 사형시켜버린다. 빡친 찰스는 존 핌을 비롯한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서 왕한테 가장 심하게 개기는 의원 다섯명을 체포하려고 쳐들어가나 이들은 도망치고, 찰스를 본격적으로 못 믿게 된 잉글랜드 의회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왕의 동의 없이 혼자서 민병대 소집법을 통과시켜버리고, 이에 찰스는 맞불을 놓기 위해 의회의 비준 없이 혼자서 군열 위임령을 선포하면서 양측은 내전 상태로 들어간다. 


이 와중 신정부를 구성한 스코틀랜드 언약파는 반란을 멈추면 장로회를 공식 국교회로 인정하고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찰스 측과, 우리랑 편 먹으면 장로회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에도 장로회를 도입하겠다고 승부수를 띄운 의회 측 사이 고민하다 역사에는 그냥 '사건'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는 1641년 10월 반언약파, 근왕파 귀족들의 쿠데타 시도를 분쇄한 이후 결국 1643년 근엄 동맹 밑 언약이라는 조약을 통해 의회파와 동맹을 맺으며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 내전에 뛰어든다. 언약파는 전쟁기 내내 스코틀랜드의 정부 역할을 하며, 남쪽으로는 국왕군, 그리고 북쪽과 서쪽으로는 로우랜드 개신교도들의 통치와 무엇보다 캠밸 가문의 영향력의 확대를 질시한 하이랜드와 아일랜드의 클랜들이 소집한 근왕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루며, 동시에 안쪽으로는 내분하면서도 올리버 크롬웰에게 정복 당할 때 까지 독자적인 전시 정부를 꾸린다. 


언약파 정부 자체는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한 잉글랜드 의회파 세력이 너무 커지는 걸 질시하다 결국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의회 뒷통수 치려는게 3차 내전과 던바, 우스터 전투에서 대파 당하고 크롬웰에게 스코틀랜드가 정복 당한 후, 이 후 왕정복고 시절 아버지 목이 날아간 전쟁이 터진 계기 자체를 마련한 놈들이 언약파였다는 걸 잊지 않았던 찰스 2세에게 아가일 공작 아치볼드 캠밸, 장로 총회 집사였던 워리스톤의 아치볼드 존스턴 경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그 자리 그레이프라이어 교회에서 처형, 옥사 당하는 걸로 분쇄 되었다. 그러나 언약파가 이루어 놓은 새로운 혁명 정부의 행정적 기틀, 전시 경제로 구축한 통제력 등은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가 물려 받고, 장로회 급진파도 스코틀랜드 사회 지배 계급으로 떠 오르며 17세기 말에 다시 한번 왕실과 충돌하게 된다. 이 와중 명예 혁명이 터지자 한 세대 전 언약파의 이데올로기를 계승한 로우랜드의 장로회측은 새로운 왕실을 받아 들이고, 역시 한 세대 전 구도 그대로 가톨릭/성공회 주류의 하이랜드의 클랜들은 자코바이트 세력에 가담하면서 다시 한번 내전이 발생, 이를 진압하고 아래 하술한 다리엔 계획의 실패로 엉망이 된 스코틀랜드의 부채를 잉글랜드 측이 떠맏는 과정에서 1707년, 드디어 양국을 단순한 동군연합이 아니라 법적 차원에서 한 나라로 통합한 통합법 (Act of Union)이 통과되면서 스코틀랜드는 독립 국가로서 역사를 끝내고 영국이라는 한 나라의 파트너 민족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스코틀랜드도 17세기 후반 식민지를 건설할 다리엔 계획이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파나마에서 남미대륙의 콜롬비아 사이에 있는 이 다리엔이라는 지방에 스코트인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무역 거점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였는데 파나마의 스페인인의 공격과 전염병이 돌아서 완전히 망하고 스코틀랜드의 재정상태는 최악이 되었다. 사실 항목을 보면 나와 있지만 이 다리엔 지역은 현대에 와서도 지구상 극한 오지 중 하나로,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잇는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끊어진 유일한 구간이다. 게다가 이곳을 탐험할 때는 여행자보험도 적용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당대 지정학적인 관점에서도 적대적인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 안마당에 가까운 중앙 아메리카 복판, 그리고 여길 개쳑하려는 스코틀랜드는 좋게 말해도 유럽 국가 중에서도 약소국 규모의 비교적 가난하고 물자가 부족한 나라. 후대의 관점으로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개척하겠다고 나섰는지 모를 동네이지만, 하여튼 이런 식민지 계획에서 국밥 말아 드시고, 또 1690년대 전반적으로 "불운한 칠년" 라고 불리는 엄청난 가뭄과 경제난이 겹치며, 이 와중에 자코바이트와의 내전도 잘 안 풀리면서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 가문과 도시 자치회들은 대부분이 파산, 혹은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된다. 잉글랜드와의 정치적 통합은 결국 이런 총체적 난국에 대한 궁극적인 타계법으로 떠오른 셈이다.


상술한 기나긴 상호 대립, 내전, 동맹, 통수의 역사 끝에 스코틀랜드는 무력으로 정복, 복속한 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자치도와 이권을 유지하되, 독자적인 주권 자체는 분명히 런던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영국에 통합되었고, 이런 역사적 유산 때문에 꾸준히 분리독립 운동이 있어왔다. 1990년대 이후 타협책으로 영국 중앙 정부는 점진적으로 자치권을 확대해왔다. 현재는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가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를 통치하고 있다. 2007년 처음 집권한 스코틀랜드 민족당이 2011년 총선에서 단독과반수를 차지하면서 공식적인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 투표를 준비했고, 투표일시는 2014년 9월 중순으로 공시되었다.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연합왕국의 4백년 왕관이 자기 대에서 끝날지도 모른다며 내심 우려하고 있다. 


대대로 프랑스와는 동맹국인 성격이 강했다(프랑스+스코틀랜드 vs 영국+플랑드르). 왕비들도 프랑스 출신이 많다.


켈트계인 스코트인의 지방이라 내심 잉글랜드를 굉장히 싫어하고, 죽어도 잉글랜드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지역성이 있다. 본격적인 무장독립운동은 아니지만, 영국에서 독립하자는 움직임도 상당히 많은데 그런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인물로 유명한 배우 숀 코너리, 밴드 프로클레이머스가 있다. 2002 월드컵 때 스코틀랜드 출신 국회의원이 "잉글랜드를 응원하자"고 했다가 폭풍같이 까이기도 했다.


역사가 이렇다보니, 스코틀랜드는 영국에서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 움직임에 관해서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문서를, 2014년에 실시되는 독립투표에 관해서는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 항목을 참고.


투표 결과, 55%의 반대로 분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제2의 분리 독립 투표를 준비한다고 한다! 단 영국이 EU를 탈퇴한다면 스코틀랜드의 EU 잔류를 조건으로 분리독립투표를 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현실화 됨에 따라 독립 가능성이 높아졌다! 분리 독립에 민감한 스페인 등 EU 회원국의 승낙 문제는 EU의 반응 등 전체적인 변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불확실하다. 셰틀랜드와 오크니의 독립 및 영연합 왕국 재편입에 대해선 스코틀랜드가 싫다기 보다는 북해의 석유를 빌미로 협상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에게 좀 더 뜯어먹으려는 명분일 수도 있지만, 결국 이것도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다만 잉글랜드에 대한 높은 시장 의존도와 재정 의존도, 그리고 영국계 석유 메이저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EU를 대신해 영연방 국가들이 몇몇 스코틀랜드 상품의 최대 소비자이자 대스코틀랜드 최대 투자자로 떠오르는 등 영연합왕국 탈퇴를 재고하게 되는 사안들도 남아있다. 결국 EU 탈퇴와 영연합왕국 탈퇴가 가지는 무게가 다르다는 점이 크다.


브렉시트 직후 최고점을 찍었던 독립 여론이 한 풀 꺾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7년이 되면서 독립 찬반투표를 재추진하고 있다. 또한 독립 지지 여론이 1999년 이후 가장 높게 집계됐다는 조사도 나오고는 있다.


다만 데일리 텔레그라프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현재 2017년 3월 기준으로 오히려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독립 회의론과 반 EU 정서가 강하게 퍼지면서 스코틀랜드 독립 반대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9월 이후 지속적으로 여론조사에서도 재투표 반대와 연합왕국 탈퇴 반대 여론이 높은 상황이고, 독립 투표 계획을 철회해달라는 청원에 20만명의 스코틀랜드 시민들이 서명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영국의 EU 탈퇴=스코틀랜드 독립"이라고 봤던 브렉시트 국민 투표 직후의 예측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스코틀랜드의 상징하면 역시 킬트로, 남자가 입는 치마로 속에는 속옷을 입지 않는다. 이 옷은 적과 싸울 때 자신의 거기를 꺼내보여 적으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거나, 혹은 용변시 빠르고 무리없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 현재 우리가 아는 킬트라는 것은 근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정립된 물건으로 정작 중세 때는 아예 다른 물건이었고, 이후 각 가문별 킬트와 타탄 체크문양이 생겨나면서 마치 중세부터 전통있는 문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근데 이게 자리 잡은게 이상한 이유인데 영국이 바지가 있는데 남자가 치마(?)라니 금지 시켰고 이에 자극받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반항심에 이걸 계속 착용하다보니 이렇게 된거라는 말도 있다. 


킬트와 함께 타탄 체크도 유명하지만, 이 역시 킬트의 유행과함께 퍼진 것으로 이전에도 이런 체크무늬를 많이 쓰기는 했지만 가문이나 클랜에 따라서 특유의 타탄을 사용하는 것은 킬트 유행에 맞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직물 상인들이 퍼트린 것이라고 한다.


씨족의 모임인 클랜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주로 고지대 주민들이 부족단위로 생활하던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직도 스코틀랜드 귀족들 중에서는 모모 부족장이라고 불리는 작위들이 남아 있다.


그 외 해기스, 백파이프로도 유명하며, 빵모자+백파이프+킬트 조합은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심볼이 되었다. 그리고 대표할 만한 스코틀랜드의 명물로는 그 유명한 스카치 위스키가 있다. 


근대 이전만 해도 스코틀랜드 사회는 군사문화가 강한 지역이었다. 게일어가 통용되었던 하이랜드 지방은 근본적으로 반유목, 목축 생활 중심의 군소 클랜들이 끊임없이 양과 소를 비롯한 가축, 목초지, 왕실의 특혜 등을 두고 서로 반목하며 싸우던 곳이었고, 그나마 농사가 어느정도 된다는 로우랜드 지방도 약한 중앙 권력과 이에 따른 귀족, 종교 중심의 파벌 문화가 강했으며, 두 지방 모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유럽 대륙이나 아일랜드, 잉글랜드에서 용병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30년 전쟁 당시 구스타프 아돌프 휘하 스웨덴의 개신교 용병으로 온 스코틀랜드인들을 묘사한 판화들을 보면 어디 문명의 오지에서 온 치마 입은 미개인들이 악마 같은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곤 한다라는 식으로 묘사하곤 했다. 이에 따라 성인 남성이라면 발칸 반도, 우크라이나 카자크 지방 같은 변경 지방의 군사문화가 발달한 다른 유럽 처럼 당연히 평소에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게 상식이자 남자의 품격으로 대우 받기도 했고, 잉글랜드와 통합 이후 신생 영국 육군의 군사 문화와 편제 창설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이랜드 클리어런스 와중에 고향을 잃고 캐나다, 미국 등지로 건너간 이들도 이런 변경 지대의 무장 문화를 가지고 주로 애팔래치아 산맥 지방으로 이주하여 그 문화와 사회 분위기를 주도, 현대 미국의 수정헌법 2조를 비롯한 총기 문화 형성에도 상당히 기여한 바가 있다. 


느끼한 맛이 강하다. 특유의 기후로 인해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탓에 육식을 주로 하는 편인데 때문에 대장암 발병률이 굉장히 높다. 튀김을 좋아하는데 딥 프라이드 피자라는 음식이 있다. 캐러멜을 튀겨서 초콜렛에 찍어 먹거나, 아예 시판되는 초콜렛 바를 튀겨 먹기도 한다. 인생에 한 번쯤 도전해볼 가치는 있으나 후환은 책임 못 지는 괴식이라고


아이언 브루라는 스코틀랜드에서만 시판되는 음료수가 인기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를 일종의 자부심으로 여긴다.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코카콜라가 판매량 1위가 아닌 나라가 3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스코틀랜드라고 잉글랜드에서도 큰 마트에 가면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스코틀랜드의 상징. 맛은핫식스와 비슷한 느낌이다. 핫식스를 안 마셔봤다면 라무네 오리지널 소다맛이나 우유 맛이 빠진 뽕따 혹은 밀키스 맛을 생각하면 된다. 일종의 자부심으로 여기긴 하지만 현지인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료. 일반 페트병보다 작은 용량으로도 판매되니 시도해 보고 싶다면 참고해둘 것.


주류 중에서 너무도 유명한 스카치 위스키는 말 할 것도 없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 맥주도 아는 사람들은 양질의 맥주라 칭송하며 고대부터 만들어 온 사랑 받는 음료이다. 도수 높고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인를 비롯한 양질의 중소규모 지역 양조장들이 많이 있고, 테넌트나 이니스&건, 벨헤븐 같은 대표 브랜드 맥주 또한 잘 팔린다. 그리고 저렴한 카페인을 집어 넣은 강화 포도주도 싼값에 세게 취할 수 있다고 많이 마시는데, 맛과 후폭풍은 책임 못진다. 이렇게 여러모로 주류와 음주 문화가 발달해서인지 몰라도, 영국의 다른 지방에 비해 일인당 주류 섭취량과 알콜 중독율이 훨씬 높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그 중에서도 장로교회처럼 칼뱅주의 교회가 주류인 나라들은 육신의 향략을 배격하고, 특히 정신을 흐리게 하는 음주를 안 좋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는 하나, 의외로 완전금지는 아닌 데다 날씨 탓도 있고, 문화적 요소도 있어서 스코틀랜드는 청교도적 가치관이 굉장히 강한 장로교의 총본산이면서도 음주에 대해서 유독 관대한 경향이 있다.


이는 청교도의 이미지가 미국 청교도의 엄격한 금욕주의가 연상되어 장로교가 국교인 스코틀랜드도 그렇지 않나 하는 편견 때문인데 미국 에서 장로회 또한 WASP들이 믿는 주류 교파(Mainline Protestant)인건 맞지만 상대적으로 다수는 아니었으며 소수는 아니지만 제임스 1세 시대부터 찰스 2세 때까지 극심하게 박해받은 재세례파나 왕정복고 이후 크롬웰 일당으로 취급된 청교도 독립파(청교도 혁명 때 소수파, 다수는 장로파)나 회중교회, 재세례파, 침례회 교도들이 미국으로 가자 영국과 영국 왕은 타락해서 망가졌다며 본래 영국 청교도보다 더한 금욕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보통 서양에서도 소설 주홍글씨에 나오는 금욕적으로 한편적으론 위선적이고 음울한 이미지가 청교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것이다.


한국과 달리 법적 음주 연령이 만 21세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 아래 잉글랜드에서도 대낮부터 술 마시고 취해 있는 건 하류층이나 하는 거라며 경멸하는데, 에딘버러나 글래스고에서는 부자던 가난뱅이던 남녀노소 대낮부터 주점에서 한 잔씩 들이키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유학생이나 출장으로 방문한 위키러들의 말에 따르면 이상한 면에서 동아시아 어디 반도 나라랑 비슷하게 수업 끝나고 교수랑 학생들끼리 한 잔, 사업 관련해서 얘기 한 후 접대로 한 잔, 새로 만나서 이것도 인연이니 한 잔 하는 식으로 기본적인 사교 생활이 알콜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강한 모양이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에서도 이런 비만과 알코올 문제를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고치려고 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름진 패스트푸드에 대량 음주를 즐기는 스코트인들의 패기 앞에서는. 고대 켈트 문화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문화적으로도 개신교 전통이 강했던 나라 치고 여전히 "남자는 자고로 기름진 고기에 술을 즐겨야지!"라는 식의 마초적 분위기가 강해서 스코틀랜드의 음주, 음식 문화의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존 녹스에 의해 종교개혁이 주도되어 네덜란드와 함께 칼뱅주의를 국교로 정했던 유일한 동네이며, 한국인들이 흔히 아는 장로회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선사해준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현재도 '국민 종교'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조심해야 할게, 잉글랜드나 아일랜드에서라 하면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 가입해 있으며, 가톨릭처럼 주교과 교구 체계를 갖춘 성공회 교단이지만, 이들과 전혀 상관 없고, 주교도 없고, 교구도 없는 완전한 개혁 교회이다. 스코틀랜드 내에서 활동하는 성공회는 스코틀랜드 성공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영국 왕실을 단순히 평신도 중 귀빈으로 취급하는 국민 교회 장로회와 달리 이쪽은 정식으로 왕실의 수위권을 인정한다. 장로교회 측에서 국제 장로회의 고향으로서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성공회를 '잉글랜드 교회'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당연히 성공회 측에서는 근거 없는 음해라며 발끈하고, 실제로도 스코틀랜드 장로회 전통만 강조하고 다른 기독교 종파는 스코틀랜드도 아니라고 무시하는 터무니 없는 음해 공작이 맞다. 


그래도 스코틀랜드에서 국민장로회는 여타 장로교 분파들에 비하면 상당히 타 교파에 너그러운 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통적으로는 하술한 이유로 근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했고, 약간 치부를 들추어 보자면 로디지아, 북아일랜드, 미국 동남부의 레드넥 지역 같은 곳의 스코틀랜드계 공동체의 후손들은 아직도 전근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이중예정설에 기반한 선민의식을 정착한 현지의 인종 문제와 결부되어 아직도 강하게 표방하고, 이에 따른 우리에게도 익숙한 개독교라 부를만한 병크도 종종 보이지만, 스코틀랜드 본토는 19세기, 20세기에 산업혁명의 중심지가 되면서 근대화, 세속화도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게다가 장로교회의 근본주의적인 파벌 뿐만 아니라 지성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신학자, 신자들도 많이 배출되어 근본주의적인 공격성이 많이 순화된 것이다. 게다가 교회의 통합성 자체도 19세기 중반에 장로교회 내에서 터진 자유 교회파 논쟁 같은 이런 저런 이단 논쟁에 내부 갈등이 터지면서 상당히 분열을 겪었고, 스코틀랜드 사회 자체는 현재 세속주의와 자유주의가 깊게 뿌리 박힌 곳이라 안 그래도 세력이 많이 약해진 개신교가 함부로 근본주의적 꼴통짓을 할 만할 여건이 못 된다. 현대 스코틀랜드의 세속화는 나머지 유럽과 비슷하게 상당히 급격해서, 한때 왕권에게 정면 도전하고, 주된 전쟁은 잉글랜드에서 치루었다 한들 왕의 모가지가 날아가게 된 계기가 된 반란을 주도했던 과거사를 생각하면 눈에 습기가 스코틀랜드 날씨마냥 가득 찰 만큼 현대 국민교회 장로회는 신자 감소와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하이랜드나 아우터 헤브리즈에는 국민교회가 아닌 자유교회와 자유장로회에 속한 교회들이 아직 좀 남아있는 편이고, 3대가 같이 가는 교회도 볼 수 있긴 하다.


내부적 신앙적 열망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종교 개혁에 가담했고, 전례나 교회 구조도 가톨릭의 그것을 상당수 유지한 잉글랜드 국교회와는 달리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실제로 장 칼뱅 본인이나 그 제자들에게 교육 받은 신학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가톨릭에 반발했던 이들이 아예 나라를 뒤집으면서 이룩한 결과이니 그만큼 종교적 열성도 뜨거웠고, 민족 정체성에도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당장 영국 내전 시기 스코틀랜드 언약파와 잉글랜드의 의회 사이 교섭한 내용이나, 이와 관련 된 스코틀랜드 측의 알렉산더 헨더슨, 데이비드 켈더우드, 아치볼드 존스턴 등의 유력한 목사 겸 외교관, 정치인들이 집필한 1차 사료에 보면 "잉글랜드 성공회는 신자들의 열망이 아니라 국왕의 변덕으로 이루어진 개혁이라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니 우덜식 장로회를 강요해야 한다)"라는 식의 주장이 많았고, 이런 종교적 대립은 결국 언약파와 잉글랜드 의회의 동맹이 파탄나고 올리버 크롬웰의 정복이라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다 보니 근본주의에 비롯한 흑역사도 만만치 않은 편. 현재의 북아일랜드 사태를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이쪽 출신들이었고, 현재도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가톨릭을 공격할 때 쓰는 체계적(?) 레퍼런스를 제공해 준 곳도 바로 이쪽에서 나온 자료들이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히슬롭이란 목사가 1853년에 내놓은 소책자 '두 개의 바빌론'을 들 수 있다.


한때는 북아일랜드와 거의 비슷한 급으로 가톨릭-장로교간의 갈등이 심했고 알렉스 퍼거슨처럼 가톨릭교도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치를 보는 경우도 꽤 있었다. 유럽 축구판의 훌리건 문화와 더불어 이런 뿌리 깊은 종파, 민족 갈등은 한때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의 글래스고를 칼빵맞기 딱 좋은 곳으로 만들었던 전적도 있었다. 그러나 세속화 바람을 타고 이러한 경향은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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